돔은 돔대로 섭은 섭대로 선호하는 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플레이는 스팽, 오컨, 애널, 풋 워십 등과 같이 상호간의 접촉이나, 상호작용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단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플레이에는 한계가 있으며, 대부분 그저 강도를 높여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일 뿐이다.

Predicament(이하 P)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필자도 이 플레이에 대해서 안지는 오래되지 않았다.(일단은 영어니까)... P는 크게 보면 방치플레이에 속한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 방치하느냐에 따라 P가 되는 것이다. 가장 쉬운 예로는 기합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P와 기합주기를 다르게 보고자 한다.
기합주기는 일반적으로 잘못에 대한 처벌로써 행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와 다르게 P는 일상이다.
돔과 섭의 위치와 규범, 그리고 규범의 이행 속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돔이 섭에게 항상 하이힐을 신게 하도록 했다고 하자.
이는 방치 플레이일까? 아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고 있기 때문에 방치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벌일까? 그것도 아니다. 섭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섭은, 돔에게 봉사할 때, 발 뒤꿈치를 항상 들고 다니게 된다. 이로 인해 발과 다리는 항상 피로함을 느끼게 될 것이고, 아슬아슬한 자태를 보일 것이다.

이는 돔에게 상대적인 우월감(지배욕)을,
         섭에게는 자신이 불편함을 강요당함을 인식(피지배욕)하는 수단이 된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되도록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이 아닌, 상대방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이러한 경험을 하곤 한다. (교수님과의 면담, 통과의례로서의 면접, 상사와의 대화 등. 물론 이 상황에서 교수나 면접관이 우리에게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서 나오는.)

위에서 나는 P가 일상이며, 두 개체간의 위치(돔과 섭), 규범(하이힐을 신게 함), 규범의 이행(하이힐을 신음으로서 느끼는 불편함)이라 표현하였다. 그리고 돔과 섭이 느끼는 만족감이 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P의 장점을 하나 덧붙이자면, 그것은 응용이다.

발꿈치를 들고 다니는 것, 형틀을 이용하는 것(소설 참조), 매듭을 이용하는 것, 앉음에도 방법을 정하는 것 등 어떠한 방법으로던 섭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기초라고 한다면, 다음은 복잡하고 응용된 P들을 보여준다.

Google 이미지 "bdsm predicament" 검색.

https://www.google.co.kr/search?newwindow=1&rlz=1C1CHZL_koKR722KR722&biw=1920&bih=949&tbm=isch&sa=1&ei=q4KwWsLhMoP48QXotonwCQ&q=bdsm+predicament&oq=bdsm+predicament&gs_l=psy-ab.3...25510.26718.0.26853.5.5.0.0.0.0.140.546.1j4.5.0....0...1c.1.64.psy-ab..0.1.138...0i13k1j0i13i30k1j0i7i5i30k1.0.-ODjIz8Vcgg#imgrc=z9hmlkW2inxnhM:

링크 참조.

자신의 플레이가 얼마나 단순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것을 생각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고안한 P를 섭이 수행하며 느끼는 섭의 불편함을 본다면, 물리적 접촉과 상호작용에서 나왔던 것과는 다른 지배욕과 만족에도 눈을 뜨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가학욕, 피학욕, 지배욕, 피지배욕.
이들은 특이한 '성욕이다.' 정신적인 측면을 아무리 강조해도, 변하지 않는 법칙이다.

대부분의 돔들은 섭이 지킬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섭은 당연스레 지키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본인을 포함하여 모두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만들 수 있는가?
가령 하늘을 난다던지 자동차 보다 빨리 달린다던지...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가학욕을 채우기 위해 혹은 지배욕을 채우기 위해
무의미한 꼬투리를 잡아 괴롭히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SM을 즐긴다. 그리고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관계를 더 유용하게 사용할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이 Dominant 성향자라면,

자신을 강아지의 조련사라고 생각하고,

Submissive에게

1. 현실에서 실용적이고, 2.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해낼(지킬) 수 있는 무엇인가를 시키자.


말 그대로다.
정말 자신이 강아지를 키운다면 배변훈련, 손, 발, 짖어 등을 가르킬 것이다. 배변훈련은 함께 사는 반려견과 주인 모두에게 실용적이고 이익이다. 이후 손, 발, 짖어 등은 강아지의 지능 혹은 둘의 공감능력에 있어 긍정적인 부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현실에 적용시킨다면,
자격증 취득, 언어 배우기, 요리 배우기, 맛집 찾기 등이 될지도 모르겠다.

'굳이 왜 이걸 해야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아마 Submissive를 인간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않는 성향이거나, 이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전자이던 후자이던, 답은 쉽다.
섭의 사회적 능력은 곧 경제력이 될 것이고,(핀돔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섭의 언어 능력은 가이드가 필요 없는 해외여행의 동반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다른 능력은 생략.)

한 마디로 섭의 능력은 곧 '당신'의 능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는 당신의 지배력이 어느 정도 섭에게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굳이 '싸지마. 왜쌌어? 누가 마음대로 싸래?'의 영역에서 벗어날 필요는 없다. 삶에서 DS가 차지하는 영역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Submissive로 잡아먹는 것도 좋지만,
'키워서 잡아먹는' 것은 어떤가 라고 생각해본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

해본적 없는 고찰 - DS

해본적 2017. 11. 20. 19:55 |

BDSM은 성행위의 한 종류이다.


삽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성적욕구를 배출하는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느 성향에 속하던 이를 부정해선 안된다. 만약 성욕이 기반하지 않으면 당신은 SMER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일반적인 행위가 아니다. 전희/애무-삽입-오르가즘과 같은 1차적인 번식행위가 아니며 차이점으로, 여러가지 복잡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요소는 심리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가학. 피학. 지배. 복종. 이 네가지 성향에서 각 심리는.


가학. 지배. 적인 측면에서는 현실에서 자신이 그릴 수 있는 캔버스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에 감사할 것이고.(만족감을 포함한다.)

피학. 복종. 적인 측면에서는 또한 자신에게 그림을 그리며 사용될 수 있도록 맡기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크게 작용할 것이다.


이것이 DS라는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 두 감정은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크게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관계가 망가질 때.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서로에게 감사하거나 믿지 못했는가. 로 말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러한 심리적 결합을 공고히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서로간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가학.지배.자가 피학.복종.자로부터 필요한 감정은 신뢰다. 신뢰는 가학.지배.자가 안정적일 때 발생한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도 이에 해당할 수 있겠으나,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매력(육체적 혹은 정신적)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 이 사람에게 맡기고 싶다. 고 느끼게 하는 그러한 매력 말이다. 예는 육체적으로는, 자기자신 스스로의 철저한 관리가 그것이 될 것이고, 정신적으로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반성이 그에 해당할 것이다.


피학.복종.자가 가학.지배.자로부터 필요한 감정은 감사이다. 일반적인 감사라는 의미와는 다르지만. 가학.지배.자로부터 만족에 의한 인정을 받을 때 감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실 앞의 성향과는 달리, 재화의 풍족함, 도구, 지식의 다양함 처럼, 많은 선택지를 주는 것은 거의 중요치 않다. 피학.복종.자의 노력에 가장 크게 좌우된다. 예는 얼마까지 버틸 수 있는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싫어함에도 상대방을 믿고 얼마나 버티느냐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러한 감정 없이, 가학 피학 등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매우 희박한 확률이며, 서로에게 맞는 상대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 끝은 그리 멀지 않을것이라 생각한다.


서로를 위하 태어나지 않은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지속적 관계유지가 가능하다. 나 또한 그리 할 것이다.


단순히 변태적 유사 성행위가 아닌, 서로를 위한 감정을 가진 한 단계 더 성숙한 성행위를 위해.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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