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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29 해본적 없는 놀이 - 산책

산책 좋아해?

산책이요?

응.

저희 집 개랑 다녀온 적은 있지만.....

그렇구나...


요즘 롱점퍼가 유행이다.

긴 길이로 전신을 따뜻이 감쌀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큰 장점이나. 나에게는 E가 나와 산책을 갈 때 입히는 유일한 옷이다. 그 안은 그저 붉은 밧줄로 그리고 붉고 푸른 자국으로 물든 몸뚱이와, 허리띠가 없으면 흘러내리는 밑위를 도려낸 요상한 바지뿐이다.

이 준비를 위해 E는 엄청난 고생을 했다. 내 몸을 꼼꼼하게 묶었으며, 내가 잘 입지 않는 바지의 밑위를 도려내버렸다.


자. 그럼 갈까?

네.....네....... 주이....ㄴ님......

싫어?

.........아.. 아니에요.....

그래? 어서 가자.


옷을 껴입더라도 추울 날씨다. 점퍼의 빈 틈으로 바람이 세어들어와 내 몸을 움추리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를 위축시키는 것은 옷 한꺼풀에 내 모든 것을 맡기고 밖으로 나온 위화감일 것이다.


주... 주인님 저희 어디가요??


E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어두운 밤, 어떤 이에게는 고요하고 어두운 시간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대낮보다 밝으며, 스쳐지는 바람 소리도 나를 움찔하게 한다.

E가 나를 끌고 온 곳은 아무도 없음직한 공터.


주인님...여긴...왜?

벗어.

네???

한 번 말하면 못알아들어?

......... 죄송합니다.


나는 상황을 인지한다.

여긴 E와 나 뿐이며,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것도 E뿐이라는 것.

쌀쌀한 겨울. 나는 나를 사람의 모습을 하도록 만든 한꺼풀의 천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모습이 드러난다. 빨간 로프, 이리저리 생긴 멍 자국, 반은 찢어진 바지,  아. 은색의 스테인리스 조각도 빼먹을 순 없을 것이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광경.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이 있었다면, 이러한 모습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이 순간에도 나는 E의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만 E가 나에게 한 말로, E가 나를 보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시작할까?

...........네..... 주인님......


나는 E의 앞에 다시 무릎꿇고 E의 부츠에 입맞춘다.
추위, 실외, 복장, 자존심, 그런 모든 것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E가 나에게 이 곳에 이 모습으로 있기를 바라는. E의 의지만이 있을 뿐이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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