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본적 없는 놀이 - Object
해본적 2017. 11. 21. 14:26 |E와 나는 꽤나 오랜시간 함께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나와의 관계가 순탄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E는 나의 근본적 문제점을 찾았다. 색깔. 생각했던 것 보다 나의 색깔이 너무 진했다. E가 원하는 색을 입히려 하면 나의 원래 색과 섞여 기분나쁜 색이 되어버린다. E는 결심한다. 먼저 나의 색을 지워버리기로.
이후 나는 철저하게 사물이 된다.
사물은 빛에 반응하지 않는다.
사물은 소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사물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의자는 그대로 있다.
사물은 의지를 표현하지 않는다.
E가 나에게 이야기한 내용이다. 앞으로 누구의 명령도 들을필요 없이. 세상의 빛, 소리 등 감각과 격리되는 것. 세상과의 단절로 남에게 보여줄 모습이 사라지면, 내가 가진 색깔도 점점 옅어진다는 것. 내가 가진 색깔이 옅어지면...... 나는 비로소 사물이 된다.
나는 안대, 귀마개, 재갈을 착용한 채 방 중앙에 서 있게 되었다. E는 나를 묶지는 않았다. 옷걸이를 묶는 사람은 없다. 나는 한치 앞에서 일어나는 움직임, 소리도 알 수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사실 처음에는 내 아래는 내 색깔을 증명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현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숙인다. 평소에 내가 느껴왔던 감각과는 다른 상황때문에 나는 답답해진다. 그리고 "내가 왜 이러고 있지, E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내가 잘못한게 뭐지?"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도 잠시, 아무와도 이야기 하지 못하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생각들은 아주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진다. 시간은 점점 길게만 느껴진다.
보고 싶어.
듣고 싶어.
말하고 싶어.
하고 싶어.
살고 싶어.
이러한 감정들이.... 극에 달했을 때.........
??
보인다. 들린다. 말할 수 있다. 움직일 수 있다. 살아있다.
'누구지....?'
E다.
E의 모습. 소리. E가 허용한 내 목소리. 움직임. 살아있다는 느낌.
나는 알에서 깨어난 새의 마음을 깨닫는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러한 자유들을 준 누군가에 대한 감사함. 이는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지를 의미하며, 비로소 그 환경에 보여주어야할 색깔을 정하는 것.
E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E의 가장 낮은 부위에 입맞춘다. 그리고 감히 말한다. 마치 내가 처음 E를 모실 기회를 얻었을 때 처럼.
감사합니다. E.
마치, 다음 번에는, 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해본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본적 없는 놀이 - Object 3 (0) | 2017.11.21 |
---|---|
해본적 없는 놀이 - Object 2 (0) | 2017.11.21 |
해본적 없는 놀이 - A day (0) | 2017.11.21 |
해본적 없는 놀이 - Morning (0) | 2017.11.21 |
해본적 없는 놀이 - Chastity 3 (0) | 2017.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