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지난 이틀 간 있었던 일이 환상이라도 되는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다만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 책상위에 놓여진 그녀로 부터 받은 편지였다. 어제의 내가 그 편지를 읽었다면 나는 나를 주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편지를 뜯지 않고 이리 저리 돌리며 겉을 살펴본다. 지난 번과는 다르게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빈 봉투였다.

나는 바보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봉투를 찢어 속을 봐도 되는 것일까?'

그저 편지 한 통일 뿐인데. 이러한 고민을 하게 된 것. 모두 그녀 때문이다.


'큭.'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그 기억들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시행한 시험과 같았다. 

'사랑이란 이름 하에 스스로를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가.'

그것이 주제.


내가 편지를 뜯지 못하고 있는 것이 두려움일까.
아니면 그 역겨운 모습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방어기제일까.

나는 편지를 서랍에 집어 넣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도, 수업을 들으면서도,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 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그녀인지, 그녀가 나에게 원하는 행동 그 자체인지에 대해서도, 내 머리속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봉투를 뜯어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난번의 메시지와 같던 편지와 달리 이번에는 장문의 편지였다.

------------------------------------------------------------------------------------------------------------------------------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다고 봐도 문제가 없을 듯 하네요.

당신이 저를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고 있어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지만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에요.


저는 당신을 소유할거에요. 제 소유물인 만큼 책임은 확실히 질거에요.

하지만 여태 당신이 쌓았던 모든 것을 모두 무너뜨릴거에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그리고 괴롭힐거에요. 언젠가 당신은 망가지겠죠.

전 망가져 버린 당신을 다신 거들떠 보지도 않을거에요.


그저 새로운 장난감을 찾겠죠.


그저 평범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알량한 생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면,

생각한 것 보다 더 큰 대가가 따를거에요.


그래도 저에게 다가오실 생각이라면, 지난 번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냈던 방으로 찾아오세요.

사회에서의 당신의 흔적을 지워줄게요.


고마워요. 나를 그토록 사랑해줘서.

----------------------------------------------------------------------------------------------------------------------------

섬뜩할 뿐이다. 그녀는 정말 마녀인가.

그녀에게 가까워지고자 한 내 자신이 두려워졌다. 나는 편지를 다시 서랍 속에 쑤셔박았다.

혼란한 정신을 가누기 위해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다.

전역 후 처음 본 그녀, 잘난 이들에 둘러싸인 그녀를 보고 질투심을 가진 나, 내가 그녀의 관심을 끌려 했던 행동들, 그녀의 터무니 없는 요구와 그를 행하고자 한 나, 메시지가 담긴 편지, 그 곳에서 본 것들, 그녀의 사과, 그녀에게 몸을 낮춰 입맞춘 나, 포스트잇, 그리고 앉을 곳이 된 나, 장문의 편지까지.

나 스스로 내 행동의 이유을 설명하기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랑이라 단정짓기엔 너무 복잡한 것들.
내 감정은 무엇이며 그 감정을 통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소유하지 못해서 생긴 질투일까? 그저 관심이 필요했던 것 뿐일까? 누군가를 기쁘게 해야겠다는 이타적인 마음일까? 노력에 대한 보답일까? 변태 성욕일까? 충성심일까? 소속감일까?

이 편지에 쓰여진 것 처럼,
그녀에게 다가간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잃는 것일까? 그녀가 나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미소 짓는다.
나를 무시하고, 다른 이로부터 욕보이고, 앉을 곳으로 쓰고, 나를 사회로부터 단절시키겠다는 여자?


됬어. 이런 장난은 그만두자. 현실로 돌아가야지.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한 가지가 머리를 스친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기를 포기한다면 앞으로 이런 감정을 다른 이로부터도 느낄 수 있을까?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이렇게 고민할 만한 그런 사람을...


이 생각은 나를 그 장소로 이끌었다.

'Untouchab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Untouchable D7  (0) 2018.06.20
Untouchable D6 - 사랑의 파괴  (0) 2018.06.17
Untouchable D4 - 사랑의 파괴  (0) 2018.06.14
Untouchable D3 - 사랑의 파괴  (0) 2018.06.11
Untouchable D2 - 사랑의 파괴  (0) 2018.06.09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